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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급 업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제때·제값 받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었다. 원사업자의 눈치를 보며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대금을 기다리는 동안, 중소 하도급업체들은 버티기 위한 대출을 반복했고 그 결과는 만성적인 자금난이었다. 정부가 이번에 발표한 ‘하도급대금 지급안정성 강화 종합대책’은 바로 이 오랜 구조적 문제를 정면으로 고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급보증 의무 강화, 정보요청권 신설, 전자대금지급시스템 의무화 등 하도급 체계 전반을 뜯어고치는 수준의 대책을 내놓았다. 전문가 TF 논의와 현장 의견이 반영됐다는 점에서 정책의 방향성이 비교적 명확하게 잡혀 있다. 이제는 문제를 알면서도 고치지 못했던 ‘예외’를 없애고, 책임을 명문화하며, 대금 흐름을 투명하게 만드는 실질적 장치들이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지급보증의 의무화다. 이제 1000만 원 이상의 모든 건설 하도급거래에는 지급보증이 필수다. 그동안 지급보증서가 생략되거나 제때 교부되지 않아 하도급업체가 보증금 청구를 하지 못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예 원사업자에게 지급보증서 교부 의무를 법으로 명시해 이런 ‘꼼수’를 원천 차단한다. 상시 점검 체계도 구축해 미이행 업체에 대한 제재가 강화된다. 말 그대로 “보증 의무의 정상화”라고 볼 수 있다.
수급사업자의 정보 접근성을 높이는 조치도 반갑다. 원도급사의 대금 수령 여부가 불투명하면 결국 하도급 대금 체불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수급사업자가 원사업자나 발주사에 관련 정보를 요청할 수 있고,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반드시 서면으로 제공받는다. 이 과정이 투명해지면 현장의 불신과 억울함도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다. 다만 발주자와 원사업자의 영업비밀 보호도 병행된다는 점에서 제도 설계가 균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전자대금지급시스템 의무화는 하도급 자금 흐름을 바꾸는 가장 중요한 장치 중 하나다. 발주자가 중간 단계의 사업자를 거치지 않고 거래 참여자별로 대금을 직접 분리 지급하는 방식은 중간 유용 사고를 막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특히 건설 분야에서 자주 발생했던 “중간에서 사라지는 돈”의 문제를 사실상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다. 공공·민간 모두 단계적으로 의무화가 진행된다면 실질적 변화가 기대된다.
물론 원사업자의 규제 부담도 일부 줄였다. 지급보증금 상한을 하도급대금 이내로 명확히 제한하고, 잔여대금이 1000만 원 이하이거나 계약기간이 30일 이하로 남은 경우에는 보증 의무를 면제한다. 이는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는 실용적 접근으로 보인다. 제도는 엄격해야 하지만, 현실성도 함께 고려돼야 지속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이번 대책에서 가장 의미 있는 점은 “3중 안전장치”의 구축이다. 지급보증기관–발주자 직접지급제–전자대금지급시스템을 세 축으로 삼아 대금 흐름을 여러 단계에서 보호하는 방식이다. 제도가 제대로 정착된다면 ‘제때·제값’은 더 이상 운이 아니라 구조가 된다. 그동안 하도급업체가 가장 취약했던 부분이 바로 이 ‘구조의 부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번 개편의 상징성은 작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번 조치를 보며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드디어 정부가 하도급 문제를 “시장 내 약자 보호”가 아닌 “경제 체력 확보”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도급업체들은 산업 전반을 지탱하는 실질적 생산 기반이다. 이들의 자금 흐름이 정상화되면, 더 좋은 품질의 서비스와 기술 개발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산업 경쟁력의 강화로 돌아온다. 결국 하도급의 안정성은 건설·제조업의 체력을 결정하는 근본 요소다.
하지만 정책은 출발점일 뿐이다. 기업 현장에서 제도가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이행되는지가 관건이다. 아울러, 수급사업자들이 새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정보 전달과 교육도 병행되어야 한다. 결국 제도의 성공 여부는 하도급 현장 곳곳에서 얼마나 ‘변화가 체감되느냐’에 달려 있다.
부디 이번 개편이 하도급업체들의 애타는 기다림을 끝내고, 더 공정한 산업 생태계를 향한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한국 산업의 경쟁력은 결국 현장의 신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